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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독립운동가] 김원봉의 아내이자, 부산 독립운동가 박차정의사.(부산 역사교육/ 부산위인 / 부산 역사탐방)

by Jason_IM 2020. 5. 22.

동래구 낙민역을 나오면 바로 보이는 박차정의사 생가 안내판.

의열단 단장 김원봉선생의 결혼후, 의열단은 함께 이끌었던 박차정의사.

 

 박차정 의사는 1910년 5월 7일, 부산 동래 복천동에서, 일제의 무단통치에 비분강개하여 자결하신 아버지와, 약산 김원봉선생의 의형제인, 김두전 선생과 육촌사이인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나, 누구보다 강직한 부모님을 두었던 그녀는 이러한 가정환경속에서 자란만큼, 남다른 민족의식을 가졌던 '위인'이었습니다.

 

부산 동래고 바로 옆에 위치한 박자정길과 박차정의사 생가.


 항일여성운동으로 알려진 학교인, 동래일신여학교를 다닐때부터, 일제에 대한 항일의식을 키워가던 박차정의사는, 근우회활동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근우회의 핵심간부로 활동하던중 '근우회'사건을 통해 일제에 검거 되어, 구속되는 고초도 있었지만, 그녀의 민족의식은 꺽이지 않았고, 석방이후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의열단의 약산 김원봉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김원봉선생과 결혼한후, 의열단의 핵심멤버로 활약하면서, 여러 의열단에서 진행하는 민족운동과 항일투쟁에 나섰습니다. 대표적으로, 남편인 김원봉선생과 함께 설립한 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여자부의 교관을 담당하였으며, 조선민족혁명당의 여러 기관지의 발행을 주도하기도 하고, 이후 조선의용대가 창설되면서는,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의 단장을 맡아 활동하는 등, 사실상 우리에 잘 알려진 김원봉 선생과 함께 의열단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위인이었습니다.

 

생가에 도착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현재는 휴관한 상태.


 그렇게 펜과 총, 모든 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던 박차정 의사는, 1939년 곤륜산 전투에 참가하여, 부상을 당하게 되는데, 이 부상의 휴유증으로, 결국 꿈에 그리던 민족의 광복을 보지못한채, 1944년 5월 27일에, 35세의 짧은 생을 마치고 눈을 감으셨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생가 안내판을 읽어보았다.

 


우리가 잊지말아야 할 숭고한 정신.

 

 광복이후,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셨고, 박차정선생의 흔적또한 박재혁선생과 마찬가지로 부산의 도심속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금정구 구서동에 위치한 '박차정선생 동상'과 동래구의 '박차정선생 생가'를 통해 만나실수 있는데요, 박차정 선생의 생가는 과거의 생가를 복원한 모습으로, 크지않은 작으마한 생가임에도 불구하고, 박차정 의사의 열의 만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코로나19로 잠시 휴관한 상태라, 이후에 다녀가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부산 금정구, 금정 문화회관에 위치한 박차정의사 동상.


( 부산 공식블로그에 쓰여진 본 내용을 확인하려면 아래로↓ )

 

http://blog.naver.com/cooolbusan/221962019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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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내용은 부산시 공식블로그 내 저자 본인의 포스팅을 참조하여 덧붙여 쓴 글임을 밝힙니다. )

 

(본 포스팅의 사진들은 저자 본인의 개인사진 임을 밝힙니다.)